2010년대 이후
정경모
정경모 열사는 1924년 7월 11일 영등포 안골마을에서 태어나 1년 재수 끝에 군 면제를 유예할 수 있던 게이오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였다.
학교 인근 요코하마의 한 민가에서 하숙하며 주인집 외동딸과 가족처럼 지냈던 열사는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돌아오겠다며 미군의 대공습을 피해 귀국하였다. 결국 한국이 해방되자, 다음 해 서울대학교 의학부에 편입한 뒤 조선을 해방시켜 준 미국을 동경해 1947년, 이승만 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했다.
미국 에모리대학을 졸업해 동대학원 화학과로 진출했던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정경모 열사는 맥아더 사령부에 통역관으로 자원입대하여 문익환 목사와 박형규 목사와 함께 미국 국무성 직원으로 근무한다. 1951년 7월에는 과거 요코하마 하숙집 딸인 지요코와 재회하여 문익환 목사의 주례로 결혼했으나, 부인이 한국 국적을 취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여성과 결혼하였다는 이유로 이승만 장학금이 끊기게 되었다.
판문점에 통역관으로 파견되어 정전 협정을 직접 목도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나,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미군으로부터 기피인물로 지목받아 해직되고 말았다. 미국 비자 발급도 불가능한 탓에 과거 유학을 갔던 미국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갈 계획이 무산되자 나중에 가족들과 같이 살 계획으로 홀로 귀국하였다.
그렇게 1956년부터 서울 원남동에 거주하며 여러 직을 전전하고 울산 서울화학단지 기술고문으로 근무하는 등 아내와 거의 만나지도 못한 채 어렵지만 열심히 생활을 이어나갔다.
1970년 9월, 박정희 군사정권의 독재행각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에 정경모 열사는 일본으로 입국하였다. 정경모 열사가 기사를 투고하던 아사히 신문사의 보증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하자 한국에서는 반체제 인사로 찍혀 입국이 불허되었고, 이후 일본 언론에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알리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1973년 8월에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언론에 한국 민주화운동에 관한 신문기사를 기고한 것이 100만부 이상 팔리는 등 일본 사회에 크나큰 반향을 일으켜 국제여론이 한국의 비상식적인 독재를 질타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 지식인들이 김대중 구출운동을 위한 단체까지 조직할 정도로 열기가 대단했던 일본에서 열사는 한일 지식인, 정치인들과 함께 김대중 사건 해결과 김지하 석방 운동을 벌였다. 또한 1980년 5월경, 광주항쟁 당시 성명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한국정세 전문지인 <씨알의 힘>을 발행하고, 여운형, 김구, 장준하가 만나 대화를 나누는 문학작품이 출간되어 한국에 전래되자 대학생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1989년에는 문익환 목사와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9개 항목의 통일 공동성명을 발표해 북한 측에서 단계적 연방제 통일 방식을 수용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알렸다. 베를린에서 민족 문제 강연회에 참석하고 김일성 추모식에 초청되어 방북하는 등 통일운동에서 크나큰 역할을 맡았던 정경모 열사는 2001년 당시 문익환 목사 기념사업회에서 늦봄통일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이전에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김대중 정부에 의해 귀국이 불허되었다.
2003년, 참여정부 시절에도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에서 초청받았으나, 과거 평양에 간 것이 실정법을 어긴 범죄였음을 인정하는 자수서를 작성하라는 정부의 요구를 거부한데다 송두율 교수 구속 사태가 발생하여 결국 귀국이 무산되었다. 2020년에는 가족들의 노력을 통해 한국 귀국이 거의 성사될 뻔 했으나 중국발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유행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정경모 열사는 2021년 2월 16일, 과거 게이오 대학을 다니며 하숙했던 그 하숙집에서 부인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96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