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이후
이이효재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 가운데 이이효재에게 빚지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고 이이효재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24년 경상남도 마산의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다. 1945년 해방 후의 혼란기에 이화여대의 전신, 이화여전에 입학했다. 미소의 분할 점령과 좌우 대립으로 분단이 확실시되던 1948년, 부친과 친했던 미군정 장교의 초청을 받아 미국 유학을 떠났다. 6·25전쟁의 비극을 멀리서 들으며 유학 생활을 계속한 끝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1957년 귀국했다. 이듬해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재직하다가 1990년 정년퇴임했다.
우리는 이런 경력을 가진 여성이 한국에서 어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위치에 있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 그가 한국 사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쉽게 예단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 적은 경력의 소유자는 그러한 짐작과 예단을 훌쩍 비켜난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경력을 지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몸도 말도 섞을 일이 없었을 일본군 위안부, 여성 노동자, 양심수 등의 곁으로 다가가 그들과 함께 싸우고 고뇌했다. 한국 사회의 계층 구조를 고려하면 기적과 같은 삶을 살았던 고 이이효재 선생. 정년퇴임 이후에 더욱 기적 같은 삶을 이어가던 그가 지난 10월 4일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낮은 곳에서 함께 싸우던 1세대 여성운동가
고 이이효재 선생은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고난에 처한 우리 민족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민을 하게 된 것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었던 식민지 경험과 장로교 목사로서 일제에 저항하던 부친의 영향이었다. 유학 생활 중 들려온 전쟁 소식은 그의 문제의식을 더욱 또렷하게 해 주었다. 귀국해 교편을 잡은 이이효재 선생은 가족 문제를 통해 민족의 현실을 들여다보려 노력했으나 미국에서 배운 구조기능주의는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가 이 같은 주류 미국 사회학의 영향에서 벗어나 한국의 현실에 다가간 계기는 1966년 이스라엘 방문과 1970년대 중반 미국 흑인사회학의 세례였다. 이스라엘의 농촌 공동체와 도시의 협동조합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여성을 지역사회의 중심으로 세워 가부장적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인종해방을 위한 사회학’이라는 흑인사회학의 주제의식에 공감한 그는 분단이라는 한국의 현실과 사회학을 연결 짓고 민족해방을 추구하는 사회학을 구축해 나갔다.
이 같은 이이효재 선생의 학문적 전환은 1978년 동일방직 노동조합 사건에서 더욱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계기를 만났다. 그의 여성 연구는 계층, 계급의 관점이 반영되어 더 날카로워지고 풍부해졌다. 유신 정권의 교육헌장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려다 고초를 치르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해직된 체험은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에 관한 그의 실천적 문제의식을 더욱더 강하게 담금질했다.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한국여성민우회 등 이른바 ‘재야 단체’를 이끌면서 그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완전한 인간이 되어 갔다.
부모 성 함께 쓰기·호주제 폐지 등 양성평등 인식 확산
이이효재 선생의 진면목은 정년퇴임 뒤에 더욱 빛을 발했다. 1990년에 출범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그가 학문적, 실천적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주도한 조직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민족의 문제를 넘어 전쟁과 여성 인권의 문제로 확장된 정대협 활동에는 여성해방의 본질에 관한 이이효재 사상의 정수가 담겨 있다. 1997년 부모 성 함께 쓰기 선언, 2005년 호주제 폐지 등 양성평등 인식을 확산하고 제도적 기틀을 마련한 계기들에도 이이효재 선생의 자취가 또렷이 남아 있다. 아직도 이이효재 선생이 꿈꾸던 양성평등 세상까지는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 가운데 이이효재에게 빚지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말처럼 한국 여성의 삶에서 이이효재라는 기적은 점점 더 일상이 되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