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최백근
수암 최백근 열사
최백근 선생은 1914년 태인동 출생, 1932년 하동 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학생운동으로 구속, 고문으로 인해 고막이 파손됐고, 출소 후 광주고보(서중)를 거처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 대학 야간부에 다니며 비밀 독서회에 가입해 활동하다 발각되자 귀국 후 비밀결사조직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 1940년 태평양 전쟁으로 징병제도가 강화되자 지리산으로 피신해서 은거하다 해방을 맞이해 잠시 귀향했다. 광주와 서울에서 주로 남북협상파와 교류하며 좌우 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운동을 남북을 오가며 전개하였으나 분단과 전쟁을 막지 못하고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6.25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남북을 오가며 남의 이승만 정권과 북의 김일성 정권과는 거리를 둔 채 근로인민당이나 중간파 혁신세력과 교류하며 강화, 인천, 경상도 지역에서 통일 운동을 전개하다 1952년 12월 경찰에 체포돼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1955년 9월까지 복역하다 만기 출소했다.
출소 후 부산과 서울에서 지내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자 다시금 평화통일과 민족자주 운동을 전개하며 혁신동지 총연맹의 공천으로 7월 당시 광양군에서 지금의 국회의원 격인 민의원에 출마 하였으나 낙선했다.
이에 그는 서울로 올라가 옛 동지들을 규합해 사회당을 창당하고 조직부장, 선전부장 등의 요직을 수행했다. 1961년 들어선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를 결성하고 혁신세력과 자주통일세력의 힘을 집결하여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민족의 역량으로 통일운동을 전개하지고 호소하며 서울특별시 위원회 사무국장을 맡는다.
그러나 5.16 쿠데타 발발로 인해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수많은 통일 인사들이 구속되는 가운데 그 또한 5월 23일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그의 동지인 최근우, 문희중은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하고 그는 11월 8일, 사형이 확정됐다. 그해 12월 21일, 최백근 선생은 파란만장 했던 생을 마감했고, 유해는 조계사에 잠시 안치돼 있다가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힌다.
살아남은 그의 동지들과 현대사 연구학자들은 그의 갑작스런 사형집행은 박정희가 남로당 군사조직의 핵심당원으로 활동한 전력으로 인해 미국이 5.16 쿠데타의 성격과 사상을 의심하자 자신이 얼마나 투철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했는지 대내외에 과시하기위해 희생양을 찾다 언론계에서 민족일보 조용수, 혁신계에서 최백근 선생을 죽였다고 보고 있다.
출처
광양뉴스(http://www.gy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