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이후
김판태
자주 평화 통일의 한 길 김판태
김판태 열사는 1965년 출생의 사회운동가이다.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난 김판태 열사는 서울대학교 체육학과를 입학하였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이던 1986년 10월 28일, 김판태 열사를 포함한 전국 26개 대학에서 모여든 2천여명의 학생들이 건국대학교에 모여 애학투련 결성식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를 미리 파악한 경찰이 학생운동가들을 전원 연행할 목적으로 학생들을 건물 안으로 몰아넣기에 이른다.
학생운동세력이 점거농성을 위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언론에 이들을 좌익용공분자들의 조직적인 농성 봉기라고 알렸다.
또한 10월 30일 전두환 정부는, 북한이 금강산댐을 만들어 서울 전체를 수몰시키려 한다는 거짓 선동을 통해 전국적으로 극심한 공포심과 반북감정을 유발시켰다.
이로 인해 학생운동 세력은 졸지에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어 모두 죽이려는 북한을 지지하는 세력이 되어버렸다.
국민 여론은 반정부적인 학생들을 모두 잡아들이길 원하게 되었고, 학생운동 세력은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소리쳤으나 이는 보도되지 않았다.
결국 4일 간의 대치 끝에, 10월 31일 발생한 경찰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으로 인해 농성 중이었던 학생 중 1520명을 연행해 이 중 1290명을 구속했다.
이는 당시 단일 사건 중 발생한 구속자 수 세계 최대 기록이었다.
김판태 열사 또한 이 사건으로 구속당해 감옥에 수감되었다.
출소 후 김판태 열사는 인천에서 노동운동에 참여해 1990년에는 인천남동공단 노조연대회의 사무처장이 되었다.
1995년에는 노동자 통일단체인 민족사랑청년노동자회를 만들어 활동하다 또 다시 구속되는 등의 고초를 겪었다.
1999년부터는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등의 단체에서 상근을 맡았다.
김판태 열사는 2001년 주한미군 지위 협정인 SOFA를 굴욕적인 불평등 협약이라 여겨 국회에서 비준동의를 거부할 것을 촉구하며 할복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김판태 열사는 이후 2005년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으로 활동하며 한미연합훈련에 위헌성이 있음을 밝혀내고, 2006년에는 한미연합상륙훈련 저지투쟁으로 집행유예를 받고 이후 청계산 한미연합전쟁지휘소에서 전쟁연습 반대투쟁을 이끄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2008년 김판태 열사는 전라북도 지역에서 활동하며 군산 평통사와 전주 평통사에서 사무국장을 맡고 군산미군기지 대응투쟁을 이끌었다.
평화적 남북관계를 위해 계속해서 투신했던 김판태 열사는 사드배치 반대활동을 위해 자비로 영상차량을 구입해 전국에서 홍보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8년 10월 14일, 김판태 열사는 신장암을 진단받은 지 3달 만에 53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