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1970년대

강무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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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광풍에 맞선 민주열사 강무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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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갑 열사는 1919년 10월 경남 의령군 지정면 오천리에서 출생하였다. 서울로 상경한 이후 현재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인 경성광산전문학교를 거쳐 이후 일본의 명문인 경도대학을 졸업하였다.

해방 전후 최현배 선생의 한글학회 등에서 활동을 하였고 수준급의 영어실력을 가지고 있던 열사는 이후 미 대사관의 통역관으로 근무를 하기도 하였다. 열사는 진보적 정당 활동을 통하여 뜻을 이루기 위해 혁신계 진보정당인 사회대중당 소속으로 김해갑에 출마를 하기도 하였다.

 

당시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반공을 무기로 국민들을 위협하고 강압적인 군부독재정치를 벌이게 된다. 장기집권에 혈안이 된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은 반인권적인 압제를 개의치 않고 자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대표적인 사법살인이라 불리는 인혁당 사건 등 일련의 간첩조작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많은 진보적 인사들이 이 일련의 사건에 연루되어 희생을 당하는데 인혁당 사건은 1964년과 1974년 2회에 걸쳐서 중앙정보부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조작되었다. 특히 1964년에는 과거 혁신계, 언론계, 학생, 정당 인사 41명이 소위 인혁당을 구성하여서 한일회담 반대 학생 시위를 배후 조종하였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는데 우동읍, 도예종, 양춘우 등과 더불어 강무갑 열사가 포함이 되었다.

 

이후 강무갑열사는 김배영 간첩사건 등에 휘말리며 또다시 고난의 투옥과 고문을 당하였다. 인혁당 관련 사건들은 모두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사건을 조작하여 허위자백을 얻어내기 위해 중앙정보부에서 잔인한 고문을 통하여 진행되었다. 몽둥이찜질, 통닭구이, 물고문, 전기고문, 잠안재우기 등의 고문이 모든 피의자들에게 가해졌다. 당시 북한으로 부터 지령을 받고 남파되었다고 조작을 하려던 군부세력은 광산업을 하던 열사가 이수병 선생에게 건넨 돈을 북한으로부터 지원받았다고 허위자백을 강요하였고 이를 위해 고문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수차례에 걸쳐 투옥과 고문을 받은 열사는 이 후유증으로 결국 몸이 피폐해져서 1973년 영면하게 된다.

 

김포 장릉공원묘지에 안장되었던 고인의 유해는 이후 2020년 모란공원으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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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통일뉴스 http://www.tongilnews.com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https://archives.kdem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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